mua's Blog
시즌2; 지금, 여기, 무아지경-

치명적 편리함

이야기 2009.08.05 15:57 by mua

....한쪽 귀퉁이에 "아주 훌륭하다"라고 적고 느낌표를 힘주어 찍자.
그리고 앞으로 잊어버리지 않고
그렇게 장엄하게 깨닫게 해준 저자에게 몇 마디 경의를 표할겸,
이 글이 내 안에서 불러일으킨 생각의 흐름을 요점만 기록해 두자.
그런데 이런!
"아주 훌륭하다!"라고 긁적거리기 위해 연필을 기울이자
내가 쓰려는 말이 이미 거기에 적혀 있다.
그리고 기록해 두려고 생각한 요점 역시
앞서 글을 읽은 사람이 벌써 써놓았다.
그것은 내게 아주 친숙한 필체, 바로 내 자신의 필체였다.
앞서 책을 읽은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전에 그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모든 것이 무(無)로 와해되어 버린다면,
대관절 무엇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한단 말인가? ......

--- <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한 권도 아니고 두 권이었다.
위의 쥐스킨트가 말한 경험을 최근 두 차례나 한 것이다.
밑줄을 그으려고 한 순간 이미 그어져있는 밑줄을 보며,
밑줄의 너무나 친숙한 스타일-연필을 쓰고 약간의 수전증이 엿보이고 그 어느 선도 똑바르지 않은-을 보며,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물증을 맞닥뜨린 범죄자의 심정이 이렇겠구나 싶었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탄'과 '휘몰아치는 체념의 파고'를 넘어 나는 산다는 것에 회의까지 느꼈다. 
비단 문학적 건망증 뿐이면 내가 이러겠는가!

며칠전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해보려고 알아보다가 마포평생학습관에서 하반기 수영 프로그램 모집공고를 봤다. 마침 시기가 딱 맞아떨어졌다. 반가운 마음에 동네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동네선배; "담주부터 마포평생학습관 수영 강습 신청받는대. 너도 같이 하자."
동네후배; "또? 난 됐어. 이번에도 두세 번 나가고 안나갈 걸 뭐."
동네선배; "내가?"
동네후배; "나 말야. 같이 끊었다가 언니가 취소하는 바람에 나 혼자 다녔었잖아. 그러다 흐지부지 됐지만."
동네선배; "너랑 같이 끊었었다구?"
동네후배; "왜 이래? 언니가 내꺼까지 접수해줬잖아."
동네선배; "내가? 너랑 같이 다녔었어?"
동네후배; "그랬는데 언니가 한번 가더니 수영장이 너무 깊어서 못다니겠다고 그만뒀잖아. 기억안나?"
동네선배; "........그랬냐?" 


그리고 어제 오랜만에 대학 후배를 만났다. 그녀는 결혼한지 13년차다.


학교후배; "언니, 제 남편 본 적 있어요. 한번 봐서 얼굴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학교선배; "내가? 언제?"
학교후배; "저 결혼하기 전에요. 명동인가 어디 까페에서 제가 데리고 나와서 만났었잖아요."
학교선배; "내가? 그 때 누구누구 있었는데?"
학교후배; "언니랑 저랑 둘이 있었죠. 얼굴이 아니라 만난 것 자체도 기억이 안나는 거예요?"
학교선배; "......그래도 기억하는 것도 쫌 있어." 


참고로, 이 대화가 있기 전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남편을 어떻게 만났고 몇 살 차이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십수년 전부터 했을 이 질문들을 나는 만날 때마다 그녀에게 해댔다는 얘기다. 
그것도 늘 '처음처럼'! 그것도 늘 새롭다는 리액션으로! 

세상엔 차암 신기한 사람 많다~
세상엔 차암 편리하게 사는 사람 많아~

그래서 결심한 게 있다. 여러 사람 쇼크사시키지 않으려면 조심해야겠다고.
사고를 당하더라도 가급적 머리는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머리를 다치더라도 머리를 열게 되는 중상은 당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
왜?
내 머리 열어보면 사람들 기절초풍해서 이럴테니까 말이다.

"뇌가 없다! 말로만 듣던 그 무뇌아가 진짜 있었어! 오오 세상에 이런 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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